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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의 설계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eldorado2030 2025. 6. 21. 19:51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헌법의 기초, 입헌정치 제도 확립, 교육령 제정 등 일본의 근대국가 체제를 설계한 인물이다. 일본의 초대 총리대신을 역임한 그는 대한제국 초대 통감으로 파견되었는데, 조선의 근대화를 명분으로 각종 규제를 통해 식민 통치체제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실상 일제 강점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 체제는 통감부 시기 이토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특히 그의 언론 장악과 역사 왜곡은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유효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1. 이토 히로부미의 두 얼굴

근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는 따로 또 함께존재한다. 우리의 근대사에 있어 일본의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교육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대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정치인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는 근대 일본 교육의 개혁자라 불리는 모리 아리노리(森 有礼, 1847~1889)를 앞세워, 일본의 교육 근대화를 촉진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이토는 근대 일본의 설계자이자, 조선 침략의 설계자로 근대의 구심점에서 두 얼굴로 양국의 체제를 만든 인물이었다. 환언하자면, 그가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 설계한 발전적 제도는,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기 위한 방식으로 역이용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 그리고 그 연결고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어떤 인물인지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우리의 역사인식은 미워하는 데서 그칠 게 아니라. 제대로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리박스쿨과 같은 이른바 보수단체의 역사 왜곡과 친일 행각들이, 마치 이토가 우리나라에서 자행한 방식과 너무나 흡사하여 그에 대해서 제대로 파헤쳐보기로 하였다

 

오늘은 그의 일본에서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하고, 추후 우리나라 초대 통감으로 왔을 때의 행적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개항기 ··일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는 EBS 다큐프라임 <개항과 전쟁>(1~3)에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2. 식민 지배 없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일본은 사실상 동양에서 식민 지배를 겪지 않고 근대화에 성공한 거의 유일한 나라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였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요인을 하나 꼽자면 바로 교육 근대화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서양 문화 전반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계기는 막부 말기 페리 제독의 개방 압력 때문이었다. 이때 서양에 대한 정보는 파견된 사절단이나 유학생들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1860년 막부가 미국에 파견한 만연견미사절단(萬延遣米使節團)의 수행원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서양사정(西洋事情)을 출간하여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소개하고, 학문의 권장등을 통해 근대국가 건설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학문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만연견미사절단은 일본이 미국과의 통상조약(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이를 비준하고 양국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파견한 것이지, 개혁이나 제도의 도입과는 거리가 있었다. 서구 문물을 본격적으로 수용하려는 의지는 메이지 정부가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을 통해 실현되었다.

 

3. 이와쿠라 사절단과 일본의 근대화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団)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수장으로,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야마구치 나오요시(山口尚芳),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 메이지 정부의 핵심 인사 46인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대사 및 부사의 수행원 18인과, 미국 유학을 위해 최초로 파견된 여학생 5인을 포함한 총 43명의 유학생이 동행하여, 전체 사절단은 총 107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871(메이지 4) 1223일 요코하마 항을 출발해, 18721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이후 대서양을 건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프로이센,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차례로 방문하였다. 귀국길에는 이집트(나폴리, 지중해, 포트사이드, 수에즈운하)를 거쳐 예멘(아덴), 아라비아해, 실론(현재의 스리랑카), 싱가포르, 사이공(현재의 호찌민), 홍콩, 상하이 등을 지나, 1873(메이지 6) 913일 요코하마로 다시 귀항하였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주요 임무는 서구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의 개정이었으나, 이는 최종적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2년 동안 전 세계 20여 개국을 방문한 사절단미국과 유럽 각국을 순방하며 교육, 과학기술, 군사제도, 문화, 사회 및 경제 구조 등 일본이 근대국가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지식과 모델을 직접 보고 배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작성된 보고서는 이후 일본 근대화 정책 및 제도 개혁의 밑거름이 되는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의 주된 발전 요인을 교육에서 찾았기에 문부성 관계자들도 사절단에 합류시켰다. 당초 사절단은 1872년 일본 최초의 국가 교육제도인 학제(學制)’가 공포되기 전에 귀국하여 서양 교육제도를 학제에 포함시킬 예정이었으나, 이토가 특명전권대사 위임장을 실수로 지참하지 않아 일정이 지연되면서, 1879년에 공포된 교육령에 반영되었다.

 

4. 국가주의와 군국주의의 표상, 가쿠슈인(學習院)

이와쿠라 사절단을 통해 유입된 서양식 교육은, 황족과 화족 자제들의 근대식 교육을 위해 1876년 설립한 가쿠슈인(이하 학습원)에 가장 먼저 도입되었다. 당시 화족의 수장이었던 이와쿠라 토모미는 학습원의 재단인 화족회관 창설을 주도하며, 설립과정에 깊이 관여하였다. 학습원은 대한제국의 황태자였던 영친왕과 고종의 고명딸이었던 덕혜옹주가 교육을 받던 곳이기도 하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유럽 순방 당시, 강대국뿐 아니라 오스트리아나 스위스 같은 약소국들 또한 국가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군비를 확충하고, 젊은이들을 징집하여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것을 목도하였다. 이것은 군사력이 자주국방과 독립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부국강병(富国強兵)'의 실현이 근대국가로의 기초를 구축하는 핵심 전략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군국주의적 인식은 곧 메이지 정부의 교육정책에도 반영되어, 학습원은 점차 ‘국가주의적·군국주의적’ 성격을 띤 교육기관으로 재편되었다. 학습원은 사관학교 진학을 위한 예비 교육기관으로 기능하게 되었고, 졸업생들은 몸이 허약하여 관료로 임용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육군사관학교나 해군사관학교로 진학하였다. 영친왕이 육군 장교로 임용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 기인한 것이다.

 

일본은 187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근대국가로의 개조를 추진하면서 군사력 강화를 국책과제로 삼아 엄청난 예산을 군비 증강에 투입하였다. 이때 육군은 독일식 모델을, 해군은 영국식 모델을 도입하여 육군과 해군의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청일전쟁(1894)이 발발하기 이전인 1893년에는 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약 30~40% 이상을 군비 확충에 할당하였다. 학습원은 이러한 국가적 전환기의 맥락 속에서 엘리트 양성을 위해 설립된 것이다. 그 누구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리라 예상하지 못했지만, 일본은 제국주의를 위한 전쟁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습원 교육과정의 특색 중 하나는 역사의식에 기반한 애국심 함양에 있었다. 역사교육은 학습원 교육과정에 반영되었고, 나아가 전국적 수준의 대국민 교육정책으로도 확산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국민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일본 사회에, 애국심과 국가 정체성 제고를 위한 역사교육은 국민통합을 위한 선결과제,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체제 구축을 위해 노력했던 메이지 정부의 고민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역사교육은 국가의 자주성과 국민의 애국심을 배양하는 이념적 기반이 된다.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와서 조선의 역사를 왜곡시키고, 역사의식을 철저히 말살시키려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5. 국가주의교육의 구축과 이토 히로부미

문부성은 1880개정 교육령에서 수신(修身)’을 소학교 필수과목으로 지정해 유교적 교육을 강화하고, 교육과정 편성 권한과 교과서 발행까지도 문부성이 직접 통제하는 등 국가 주도의 교육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육정책은 의무교육 확대와 함께 부국강병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이토가 있었다. 그는 메이지 정부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면서 정치는 물론 교육정책 전반을 기획하고 이끌어나갔다.

 

이토는 1881년 이른바 메이지 14년의 정변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뒤, 교육제도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882년에는 당시 화족회관 부속 교육기관이었던 학습원에 새로운 학칙과 교칙을 적용하면서, 이를 문부대신이 직접 정하도록 하였다. 이듬해부터는 학습원이 궁내경의 지휘와 감독을 받게 되었고, 1884년에는 궁내성 소속의 관립학교로 전환되었다. 당시 궁내경은 바로 이토 자신이었고, 학습원을 황실 직속 교육기관으로 만들어 국가주의적 교육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것이 하나 있는데, 1880동경외국어학교에 <조선어학과>를 설치하여, 외무성을 비롯한 육군과 해군의 위탁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서 윤진초이(이병헌 분)의 동문으로 등장한 일본군 장교 모리 다카시가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것 또한 이러한 시대적 맥락을 이해한다면 자연스러운 설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위 관료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때 이미 조선 침략의 초석을 다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쿠라 사절단 5인방의 한 사람으로 권력의 핵심에 들어서게 된 이토는 기도 다카요시의 죽음, 사이고 다카모리의 자결, 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로 메이지 3걸이 모두 사라지고, 화족의 수장이었던 이와쿠라 토모미마저 사망하면서 메이지 정부의 명실상부한 최고 실세가 되었고, 1885 내각제도를 수립하여 초대 총리로 근대일본의 정치와 교육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특히 1차 내각이 수립되자 당시 보수파이자 천황의 최측근인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모리를 문부대신으로 임명하여 일본 근대 교육제도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후 대일본제국헌법(1889)의 공포와 교육칙어(1890)의 발포 등으로 근대 국가체제와 국민교육체제를 수립한 메이지 정부는 국민통합과 부국강병을 실현시켜 나갔다. 더욱이 1895청일전쟁의 승리로 산업혁명이 급진전 되면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이에 부응할 수 있는 인재들이 요구됨에 따라 1900년에는 4년 무상의무교육, 러일전쟁 승리 후 1908년에는 6년제 의무교육을 실현함으로써 98에 육박하는 엄청난 취학률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가주의교육의 실현 뒤에는 이토와 모리가 있었다.

 

6. 전범국에서 군사 강국으로 재무장한 일본

전범국가인 일본은 과거 청산과 반성의 진정성 없이, 현재 제도적으로나 실무적으로 전쟁 수행 능력을 갖추고 있다. 2014년 아베 신조 전 총리는 헌법 제9(전쟁을 포기하고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해석을 변경해, 동맹국에 대한 무력 공격이 발생할 경우 일본도 최소한의 무력 사용(집단적 자위권 행사)이 허용된다고 발표하였고, 2015안보 관련 법’(안보법제)으로 이를 뒷받침하여, 자위대가 해외에서 미군 등과 연계해 무장지원과 보급 그리고 무기 사용이 가능해졌다.

 

일본의 방위비는 2024~2025년 이미 사상 최고 수준으로 증가하였고(11조 원 추정), 호위함, 잠수함, AEGIS 구축함, 헬기 탑재형 항공모함, 순항미사일(토마호크 도입 예정) 등 군사 능력이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또한 20253월에 미국 등과의 작전 연계 강화를 위한 지휘 통제 체제의 실질화를 목표로 통합작전사령부(JJOC)가 공식 출범하여 육··공 자위대를 통합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4월에는 자위대와 외국군의 공동 훈련 등 다국가 안보 협력을 법제화한 RAA(협력정비협정) 이행법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행보를 우리는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은 현재 세계 3위(3위~5위)의 군사 대국으로 언제든 전쟁이 가능한 준비된 국가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